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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정 (癡情) 5

남녀 간의 사랑으로 생기는 온갖 어지러운 정.

    나는 늘 전정국한테 졌다. 결과적인 게 아니라, 과정적으로. 결과적으로 늘 이기는 건 나였고 관심을 받는 건 나였지만, 이상하게 전정국은 나보다 앞에 있었고,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 나는 단지 ‘전정국’이라는 선물을 막는 포장지에 불과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그런 존재. 아, 결국은 나도 상류사회의 버러지같은 놈들과 똑같은 건가.겉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비었네. 몸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 마냥 앞 뒤로 공기가 빠진다. 공허해. 


   태형은 옆에 누운 윤기의 얼굴을 매만졌다. 잘 잔다. 내가 어제 진짜 무슨 짓 했으면 어쩌려고 겁도 없이, 마냥 순진한 얼굴로. 감은 얼굴에, 하얀 얼굴에, 검은 속눈썹에, 내 온 우주를 담는다. 눈두덩이에 살짝 입술을 붙였다가 뗀 후 몸을 일으켰다. 책상 옆에 놓인 전신거울 앞에 살짝 서서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을 맞췄다. 난 진짜 뭘 원하는 거지. 살면서 이렇게 용을 쓴 적이 있던가. 연보라색 실크 잠옷 자켓을 벗어 전신거울 위에 걸치자, 한 순간에 태형의 얼굴이 사라졌다. 아직도 나 자신과 마주치는 건 어렵네. 자켓을 벗어 바람이 망설임 없이 제 몸을 스쳤다. 널 처음 만났을 때가 겨울이었는데, 어느새 벌써 봄이다. 온전한 봄. 봄의 냄새, 새 생명이 잉태하는 계절. 

   얼마 전 봄 용 이불로 바꿔 살짝 까슬한 이불을 윤기의 얼굴까지 끌어 당겨 덮어준 후 욕실로 향했다. 아침부터 따뜻한물이 담겨진 욕조에 들어가는 건 태형의 오랜 습관이었다. 이러고 있으면 딱, 6살의 그 때로 돌아가는 것만 같아. 아무 것도 모르던 그 때로. 


   7살, 나는 목련반이었다. 그 때에도 나는 지금과 다를 것이 없었다. 유난히 말 수가 적고, 친한 애들이 없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목련반 애들 중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한 명 더 있었다. 그 애는 나보다 한 살 더 많았는데, 그 애와 그 애의 엄마는 우리와 매우 친했다. 항상 같이 있을 정도로. 근데 난 왜 걔랑 안 친했지? 엄청 작고 하얗고 요정 같은 그런 애였다. 늘 혼자서 그림을 그리고 무언가를 적는 애였다. 그 조그마한손으로 늘 뭔가를 창조하고 있었다. 

 하루는, 그 애가 그림을 그리고 있길래 옆에서 쳐다 보았다. 온통 검은 배경에 중간에 빨간 네모가 있고, 그 네모 아래 쪽 중앙에는 노란 동그라미 두 개, 앞에는 흰색 졸라맨이 있었다. 겉으로는 내가 그려도 이거보단 잘 그리겠다며 허풍을 떨었다. 그 일 이후로 우리는 같이 있는 날이 많아졌다. 그 애는 우리 반 이름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나는 촌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반 이름이 왜 좋은데?”

“난 목련 좋아하거든.”

“형, 목련 본 적 있어?”

“없어.”

“근데 왜 좋아해? 본 적도 없으면서.”

  

그냥.... 보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좋아해. 그 말을 하는 애의눈이 벌겠다. 그리고 생각했다. 꼭 목련을 키우기로. 꼭 키워서 그 애에게 보여 주기로.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애는 사라졌다. 그 때 아빠는 그 애의 엄마가 많이 아프다고 했다. 그 애가 사라지고 나서, 우리 유치원 앞에는 목련 나무가 심어졌다. 보고 싶었다며. 조금만 더 있지 그랬어. 보고 싶다,보고 싶어서 좋아해. 아무것도 몰랐을 7살의 첫사랑이었다.


  그렇게 떠나고 어떻게 지내려나. 나는 아직도 형 때문에 목련을 좋아하는데. 뜨거운 물 때문에 공기도 뜨겁다. 뜨거운 공기가 내려와 어깨를 누르고 몸을 누른다. 계속 이렇게 있다가는 노곤해질 것 같아서 몸을 일으켰다. 차가운 물로 몸을 헹군 후, 샤워 가운을 입고 욕실을 나왔다. 머리에서 물이 떨어지고 침대를 봤는데, 언제 나간 건지 이불은 깔끔하게 개어져 있고 작은 몸뚱아리는 없다. 새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방문을 열자마자, 앞에 서 있는 전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기다리는 버릇이 없는 전정국이 기다린다는 건, 필시 자기 마음에아~~주 안 드는 무언가가 있거나, 그 아~~주 마음에 안 드는것 때문에 화를 식히는 중이니라. 


“무슨 일이야?” 

“민윤기가 왜 네 방에서 나와.” 

“아, 봤어?”

“민윤기랑 잤어?” 

“네가 무슨 상관이야.” 


내가 묻잖아. 씨발, 넌 그냥 대답이나 해. 또 감정 조절이 안 된다. 이래서 전정국은 내 아래라고 내가 그렇게 짓이겨 밟고있는데도 왜 넌 항상 내 위인 거냐. 왜. 왜 항상 나보다 앞에 있냐고.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었다. 당장이라도 전정국의 면상에 주먹을 꽂고 민윤기를 좋아한다고 하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구질하게나마 내가 전정국보다 위라는 걸 입증 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근데 이건 현실이잖아. 이곳은 정글이고.


“잤어.”

“뭐?”

“잤다고. 왜. 넌 되고 난 안 돼?” 


 찰나의 순간이라도 진실을 보이는 순간 잡아 먹히는 곳, 다 같이 위선자가 되는 곳, 예술가가 되는 곳, 미치광이가 되는 곳. 여기. 상류사회. 


  전정국은 성큼성큼 다가와 내 멱살을 잡아 당기고 내 목에 커터칼을 갖다 댔다. 형. 나는 말야, 내 소유를 남들이 건드는거 싫어해. 형도 알잖아. 나 뺏기면 눈에 뵈는 게 없는 거. 아,전정국의 목소리는 머릿속에 울려 퍼지고 목에서는 얕은 뜨거운 무언가가 흐르는 듯한 감촉이 느껴진다. 정국이 커터칼을 거두자 칼날이 묻어 있던 피도 떨어져 나갔다. 목을 손바닥으로 감싼 태형이 정국의 머리칼을 잡아 뒤로 젖혔다. 젖혀진 정국의 목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태형이 더 힘껏 손아귀에 힘을 가했다. 미친 자식. 소리 한 번을 안 내내. 


“정국아, 그건 나도 그래. 나도 뺏기면 눈에 뵈는 게 없다.”

“이런 식으로 형제인 거 티 내고 싶지는 않은데.” 


난 네 친 형 아닌데. 안쓰러운 자식. 방 문으로 던지다 시피 정국의 머리를 놓은 태형이 물이 떨어지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내 목에 상처난 거 보고 민윤기는 어떤 표정을 지으며 어떤 말을 할까, 같은 호구 같은 생각이나 하면서 문을 거칠게 닫았다. 문을 닫는 사이로 정국의 웃음이 스치우듯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아, 진짜 치정 시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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