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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정 (癡情) 4

남녀 간의 사랑으로 생기는 온갖 어지러운 정.


       솔직히 말해서, 나는 욕심이 있는 편이 아니었다. 흔히들 가지고 있다는 권력욕도 명예욕도 그리고 성욕까지도. 상류사회 안에서 여자들을 끼고 놀아나는 사람들을 볼 때면, 한심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속이 메스껍고, 하찮아 보이고, 더러운 새끼들. 벌레 보듯이 봤다. 정말 벌레 같아서. 몇 달 전, 손에 꼽을 정도로 값 비싸던 호텔에서 본 바퀴벌레 같아. 겉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추악하잖아. 벌레 같은 새끼들. 각종 연회장에서 술잔만 기울이며 여자들 가슴이나 쳐다 보는. 태형은 머리를 쓸어 넘겨 침대에 그대로 누웠다. 그래. 그랬다. 김태형은 그런 사람이었다. 욕심 없는 사람. 여자들이랑 못 노는 재미 없는 사람, 혹은 고자. 라는 수식어만 무수히 많은 사람. 이게 나를 칭하는 말인데, 요근래 나는 뭔가 좀 이상하다.남부러울 거 없는 재력에, 깔쌈한 외모, 훨친한 키도 가지고 있는데. 내가 원한다면 여심은 물론이고 남심까지 쓸어 모을 수 있는 난데, 왜 민윤기 하나 못 가져. 

  처음에는 단지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기로했었다. 그렇게 마음 먹었고,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같이 통학하고 같이 점심 먹고 옆 방에서 지내고 같이 자고. 그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애초부터 나 자신을 이용하라고 한 건 나였으니까. 근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미련하다. 나는 여기까지라는 걸 알면서도, 그걸 깨고 싶어진다. 더 좋아하는것도 나고, 결국에 더 상처 받을 사람도 나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라도 옆에 서고 싶어진다. 

 침대에 걸터 앉자, 침대 매트리스가 깊게 패인다. 밥을 못 먹은 탓에 배에서 소리가 난다. 머리가 울린다. 결국 눈을 감고 그대로 뒤로 쓰러져 침대에 누웠다. 좆같게도, 아까 봤던 민윤기와 전정국의 형상이 보인다. 그 때 문 열고 들어갔어야 했다. 뻔뻔하게,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이 둘의 섹스를 빌미로전정국을 협박했어야 했나. 협박 한다 한들 뭐가 달라질까. 전정국이 내 말에 잔뜩 쫄아서 민윤기와 섹스를 안 할까? 씨발. 걘 더 하겠지. 보란 듯이 더 하겠지. 왼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항상 이랬어. 항상 전정국이 이기고 난 졌지. 


“김태형. 자?”

“....민윤기?” 

“아, 안 자네.” 

“무슨 일이야.”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정말 새하얗게 하얀 민윤기의 얼굴이었다. 맨들맨들한 피부와 밤하늘같은 눈동자. 그 눈동자 속으로빨려 들어가고 싶었다는 거, 민윤기는 알까. 


“뭘 그렇게 빤히 쳐다 봐.” 

“그냥....” 

“이거. 아주머니가 너 밥 안 먹었다길래.” 


민윤기 손에는 밥 그릇과 여러가지 반찬을 담은 판이 들려져 있었다. 아깐 그렇게 지옥 같았었는데. 밥 들고 온 민윤기가 뭐라고 기분이 왜 이렇게 좋지. 침대에서 일어나 자세를 고쳐앉자, 민윤기가 허리를 짚으며 탁자에 그릇들을 내려 놓았다.허리가 왜 아픈지, 왜 종종 미간을 찌푸리는 지 알면서 그릇을 내려 놓은 가느다란 손목을 잡고 물었다. 


“어디 아파?” 

“뭐?”

“허리 짚길래.” 

“...아. 아까 오면서 계단 손잡이에 허리 박았더니.” 


거짓말 하네. 우리 집 계단 손잡이 뭉툭해서 부딫힐 일도 없는데. 뻔히 속이 보이는 거짓말에도 그러냐며 그냥 넘어갔다.나는 딱 이 정도일 걸 알기에. 민윤기는 약간 어색한 미소를 보이더니, 이내 돌아서서 나갔다. 민윤기가 나가자마자, 밥을퍼먹던 숟가락질도 멈췄다. 맛 없어. 정말로, 민윤기가 나가자마자 밥도 맛이 없어진다. 밥은 두 숟갈 정도 먹은 채 그대로 아래로 내려 보냈다. 


   벌써 밤이다. 오랜만에 학교 다녀온 건데 하루가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 책이라도 읽을까, 싶어서 아버지가 작년에 아버지가 선물해 주신 책 한 권을 꺼내자 사진 한 장이 떨어진다.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다. 언제 찍은 거지. 사진 속에는 유년 시절의 나와 아버지, 어머니, 더 어렸을 전정국과 한 명 더. 누구지? 가족 사진 같은데. 한참을 바라 봐도 화질이 안 좋은 탓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누구를 닮은 거 같은데. 나중에 아버지한테라도 물어볼까, 싶어서 그냥 책상 위에 올려 두고 테라스로 향한다. 늘상 생각하는 거지만, 밤공기는 사람을 온전하게 만든다. 

 바로 앞에서 보이는 민윤기네 방은 컴컴하니, 불이 꺼져 있다. 민윤기, 항상 밤 아님 새벽에 담배 태우던데. 오늘은 안 태우나. 하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민윤기는 익숙한 듯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모습을 드러냈다. 귀여운 토끼 캐릭터가듬성듬성 그려진 남색 잠옷에 담배라니. 퍽 안 어울리는 조합이지만, 공허한 민윤기의 눈을 보자니 어울리는 것 같은 착각도 일으켰다. 민윤기, 사람이 참 대단하네. 불협화음도 이젠 또렷한 화음처럼 들리잖아. 부러 책을 큰 소리 나게 닫자, 그제야 민윤기가 제 쪽을 바라본다. 


“...아, 너 담배 안 피우지. 너 들어가면 필게.” 


사람 속은 이렇게도 태워 놓고, 담배는 안 태운댄다. 괜시리 묘한 느낌에 실소가 터졌다. 


“피워. 나도 담배 펴.” 

“너 흡연자냐? 피는 걸 못 봐서 몰랐네.” 

“나 겉옷 주머니에 담배갑 있는데.” 

“아... 그냐.”

“나한테 관심이 없네.” 


관심 좀 가져주지, 라는 말은 삼킨 채 웃어 보였다. 윤기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빨아 들이고 내뱉을 때마다 매캐한 냄새가 코 끝을 맴돌았다.민윤기는 담배 만날 피우는데 어떻게 담배 냄새 하나 안 나지. 좋은 냄새만 나던데. 민윤기는 아무 말도 없이, 적적하게 테라스 밑의 정원만 바라봤다. 추운 모양인지 코 끝과 양 볼, 귀끝은 발갛고 담배는 다 태워져 가는데 민윤기는 들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담요라도 하나 걸쳐 줘야 하나. 저러다 감기 걸릴 거 같은데. 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민윤기는 고개를 돌려나를 바라본다. 정말 민윤기의 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민윤기 눈 속에는 내가 비치지 않는다. 오로지 검음, 그거 하나야. 

  나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담배를 재떨이에 지져 끈 민윤기는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 떨리게 쳐다보고선 아무 말도 없네. 그런 시선에 두근거리는 나도 미친놈이지. 책을 챙겨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겨울 끝자락이라, 살짝 따듯해진 감도 있었다. 책을 책상에 던져둔 후 아까 책상에 올려 뒀던 폴라로이드 사진을 보는데, 도통 누군지 모르겠던 아이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 보았다. 꽤 흰 듯한 피부, 까만 머리, 얼굴에는 웃음기도 하나 없고 눈에는 오로지 공허함과 검음만 담았다. 검음. 익숙한 눈동자. 


....아, 설마. 


보물이라도 숨기듯 사진을 책꽂이 깊숙한 곳에 숨겼다. 보면 안 되는 것을 본 기분이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민윤기와 내가 왜 같이 있지? 어지러웠다. 사진을 아버지에게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했던 게 부서졌다. 아버지가 뭔갈 숨기고 있겠다는 생각에 들어서였다. 


“...김태형.” 

“어?”


문을 꽤나 시끄럽게 박차고 온 사람은 전정국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닌 민윤기였다. 


“너 왜 내 방 안 와.”

“....”

“불면증 있다며.” 

“...아.” 


별다른 말을 찾지 못한 채 가만히 앉아만 있자, 민윤기가 걸어와 내 손목을 붙잡아서 일으켰다. 

  오늘은 내가 잠이 안 와. 내 방에서, 나랑 같이 좀 있어주면 안 돼? 


...아, 폴라로이드 사진이고 뭐고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그냥, 민윤기가 미치도록 안고 싶어졌을 뿐이다.


“그래, 가자.”

“나도 때마침 잠이 안 오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서로 맞닿아진 입술이, 몸이 뜨거웠다. 질척하게 혀가 섞이자, 알 수 없는 욕망이 들끓었다. 상황이 어찌 흘러가던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냥 이대로, 우리 둘만 남았으면 좋겠다고, 태형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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